고영석 담임목사의 주일 설교를 통해 말씀 앞에 서는 시간을 나눕니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시편 66:1,5)
세상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보여주세요." "보여주면 믿을게요." 이 말은 언뜻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오만이 있습니다. 이 말의 중심에는 '나'가 있고, 하나님은 '증명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고 하나님이 객체가 되는 순간, 신앙은 무너집니다.
하지만 성경은 정반대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보여달라"가 아니라, "와서 보라"고 말씀하십니다(시 66:5). 이 말씀은 인간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하나님은 논쟁의 중심이 아니라 만남의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또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였도다"(요 6: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도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요구하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고 답하셨습니다.
기적은 믿음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표적은 영광이 되고, 믿음이 없을 때 표적은 구경거리가 됩니다.
플라톤은 "보이는 것은 그림자일 뿐"이라 했고,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와 흄은 "보이는 것, 경험한 것"만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분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철학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신론이 옳으려면 인간은 우주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결국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 자체가 더 큰 믿음을 요구하는 역설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추상적 사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역사 속의 하나님, 실제로 일하신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셨고(출 14장), 요단강을 멈추게 하셨습니다(수 3장). 그분은 철학 속의 개념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살아 움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 66:10-12)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정금처럼 단련하시고, 결국 풍성한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증명을 넘어 만남의 자리로 초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이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62:1-2)
우리는 종종 삶 속에서 흔들립니다. 불안정한 관계, 경제적 어려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하지만 오늘 시편 62편의 다윗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이시며, 그 반석 위에 서면 크게 흔들리지 아니한다는 고백입니다.
다윗의 고백에는 '기다림'의 영성이 있습니다.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 우리의 계획, 우리의 힘, 우리의 지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구절을 시편에서 반복합니다(62:2, 62:6).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시 62:9), 결국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반석은 하나님뿐입니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고,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시 62:10).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시 62:11).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우리의 감정도, 상황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권능과 인자하심입니다. 이 반석 위에 설 때, 비로소 우리는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다음세대교회는 이 땅에 수많은 다음세대들이 '다른 세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작지만 우리 교회부터 이 사명을 감당하려 합니다."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는 예수님과 가까운 세 남매 —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오지 않으시고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 계셨습니다. 나사로가 있는 지역과 같은 지명이지만 다른 지역입니다. 나중에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라고 했으니, 최소 가는 길이 2일 정도 걸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체하심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셨습니다. 죽음이 무덤에 가두고 있던 나사로가 생명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이 기적은 단순한 회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선포하는 표적입니다.
다음세대가 영적 죽음에 빠진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다음세대들이 교회로 올 수 있도록,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양육하고 훈련하고 세워나가고자 합니다.